지역정당 해방일지
정당을 만들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울 은평구에서 살거나 활동하는 사람 삼십여 명이 모여 은평구를 근거를 두고 활동하는 은평민들레당이라는 지역당을 만들었다. 국회의원, 대통령을 배출하는 전국정당에 익숙한 대부분 사람은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한다. 정치를 좀 안다는 사람에게도 고작 삼십여 명의 동네 사람들이 정당을 만든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정당을 만들었다고 정치 활동이 저절로 보장되지 않는다. 은평민들레당 같은 지역정당은 정당법상 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역시도당을 다섯 개 이상 만들고 수도 서울에 중앙당을 두지 않으면 정당 등록이 안 된다. 정당 등록을 못 했으니 당의 이름으로 후보도 내지 말라고 한다. 당의 이름으로 현수막을 걸고 캠페인을 열심히 하려면 정당이 아닌 것이 '정당 행세'를 한다 해서 최소 벌금형에서 징역형까지 각오해야 할 판이다. 육십 년 묵은 현행 정당법은 민의를 두려워했던 독재통치의 유산이다.
간혹 신선한 시도라도 관심을 받는 때도 있는데 지역정당이 신박한 발명품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한국과 같이 정당설립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지역정당 등 다양한 형태의 정당설립을 막는 것이 신박한 발상인듯싶다. 바야흐로 지역자치, 지방분권의 시대라는데 정치 제도는 독재 시절의 낡은 틀에 갇혀있으니 제대로 된 자치, 분권은 언감생심이다.
지역정치는 공천권이라는 먹이사슬로 중앙정치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다. 특히 지방 의원에게 거대 양당의 공천은 당선증이나 마찬가지다. 제일의 당선 전략은 지역 민의를 살피고 꼭 필요한 정책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공천권자에게 충성심을 확인받는 일이다. 지역은 중앙정치의 동원 대상으로 전락했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조례 발의는 고사하고 회의도 참석하지 않는 의원이 부지기수인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음습한 구조에 숨어 지역 기득권 세력과의 합법, 탈법 이권 카르텔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역 정치의 실종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확연히 나타났다. 대선 연장전으로 치러진 지방선거는 지역 의제는 실종된 채 확성기 소음만 요란한 거대 양당의 점령지 쟁탈전이었다. 선거가 끝나기도 전에 무려 오백 명이 넘는 후보가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주권자인 시민은 구경꾼이 되어 자신의 주권을 공손한 인사와 악수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다. 거리 곳곳에서 휘날리던 현수막, 바닥에 뒹굴던 명함들 속에 지역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얼마나 담겨 있었을까.
차라리 지방선거를 없애자거나 정당 공천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이런 현실이 정치 불신과 무관심을 낳고, 권력을 주고받으며 공생하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은 정치 불신과 무관심을 자양분 삼아 유지된다. 공고하게 유지되는 기득권 속에서 주권은 증발하고 자치는 껍데기가 되는 악순환이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주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참여와 자치가 역동하는 우리 모두의 리그로 만들 수 있을까.
지역정당이 가장 확실한 해답도, 유일한 해답도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지역정당 운동은 당면한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매우 현실적인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이해와 욕구를 대변하는 다양한 정치세력과 정치인이 등장해서 기성정당과의 경쟁을 통해 정치혁신과 발전을 도모하는 기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주권자의 자치 경험, 정치적 요구에 대한 효능감이다. 작은 단위에서부터 당사자 스스로 결정하고 대표자를 만들고 책임을 지는 것. 높으신 분들이 천상에서 가지고 놀던 정치를, 희로애락, 생로병사의 우리 삶의 현장으로 끌고 내려오는 일이다. 메시아는 필요 없다.
은평민들레당 보다 앞서 직접행동영등포당, 과천시민정치당이 창당을 했다. 세 당 모두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비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당명에서 엿볼 수 있듯 근거 지역뿐만 아니라 활동 스타일도 다양하다. 지난 지방선거 대응도 서로 달랐다. 직접행동영등포당은 정당법이 어찌 되었든,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선관위가 으름장을 놓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당 대표가 셀프 후보가 되어 꿋꿋하게 명함도 돌리고 캠페인도 했다. 과천시민정치당은 지역 현안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을 위해 고민 끝에 무소속 후보를 지원하기로 했다. 은평민들레당은 후보를 내는 대신 내실을 다지기 위한 일들을 모색했다.
세 지역정당은 현행 정당법이 헌법 제8조가 보장하는 정당설립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이전에도 같은 내용의 위헌소송이 있었는데 헌법재판소는 군소정당 난립하면 정치가 시끄럽게 된다고 합헌 판결을 했다. 육십 년 전 독재의 논리와 똑같다. 기득권 세력의 눈치를 보시는지 심사숙고를 하시는지 몇 달이 지나도록 아직 아무런 답이 없다.
전례가 없는 일이라 조직의 꼴을 갖추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당연하게 여겼던 절차와 규칙도 조직의 성격과 규모에 맞게 손 볼 때마다 매번 아리송했다. 지역 정치의 필요를 충실히 담으면서도 가치와 지향이 중심을 잃지 않는 강령을 만들려고 애썼다. 다른 무엇보다 어려웠던 일은 함께할 당원을 모으는 일이었다.
창당 준비를 하면서 참여를 권유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진보정당 활동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지역정당 운동은, 공감은 되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할 만큼 매력적인 일은 아직 못 되는 것 같다. '거대한 소수'의 꿈을 버리지 못한 이들에게는 진보정당의 곤궁을 우회하려는 마뜩잖은 시도일 테고 진보정당의 균열과 부침을 겪으며 저마다의 회한과 상처를 안고 있는 이들에게는 고단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일 것이다. 우선 힘에 부치지 않고 꾸준히 몰두할 수 있는, 작은 성과라도 체감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지역 현안을 살피고 정책을 고민했다. 그런데 여전히, 아니 진도를 나가면 나갈수록 되돌아가서 마주하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지역이란 무엇일까? 지역정당 운동을 한다면서 지역을 모르다니.
서대문구에 살고 서초구에서 노동하며 은평구에서 활동하는 내게 지역이란 무엇일까. 은평구에 집을 소유한, 이른바 재산세를 내는 주민과 이년마다 살 집을 찾기 위해 부평초처럼 떠도는 이들이 체감하는 지역의 의미는 사뭇 다를 것이다. 집값을 위해 토건 사업을 요구하는 이들과 이것 때문에 쫓겨나는 철거민들, 지속가능한 생태적 삶을 바라는 이들이 바라보는 지역도 다를 것이다. 여러 개의 자물쇠를 달아도 안심하지 못하고 안전한 귀갓길이 절실한 이들에게 지역이란 무엇일까. 기후위기를 걱정하지만 내 집 앞 자원재생센터는 용납할 수 없는 이들의 지역은 어떤 것일까. 컴컴한 새벽에 일터로 나가 저녁에 돌아오는 이들에게 지역이란 또 어떤 의미일까? 자칫 지역정치가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각자도생의 확장판이 되지 않을까.
'지역에서 세상을 바꿉시다' 은평민들레당 강령의 제목이다. 첫 발걸음이라고 강조하고 싶지만 결코 아니다. 이 발걸음 아래에는 비록 희미하지만, 지역을 바꿔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수많은 시도가 퇴적되어 있다. 희망과 좌절의 그 길에서 마주쳤던 질문의 답을 다시 찾아간다. 상투적인 구호를 꺼내 새삼스럽게 읽어보았다.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https://www.nodo.or.kr/2022/05/22-5.html?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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